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 왕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왕국]]으로 승격되기 전 [[동군연합]] 시절의 역사는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과 [[프로이센 공국]] 참조. [[1701년]]에 브란덴부르크 [[선제후]] 프리드리히 3세가 [[프리드리히 1세(프로이센)|프리드리히 1세]]로 즉위하면서 영지인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 및 [[동군연합]]인 [[프로이센 공국]]이 통합하여 단일 왕국으로 승격하였다. 사실상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위주의 통합 및 승격이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가 본체였으나[*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 [[쾨니히스베르크]]가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[[베를린]]에서 [[호엔촐레른 가문]]의 군주들이 머물렀던 사실 하나로도 확인 가능하다. 프로이센 왕국 선포 이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중요한 도시였지만 [[대관식]] 개최지와 왕실의 피난처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고, 그나마 대관식을 올린 국왕도 딱 2명이었다. 심지어 [[독일 통일]]의 주역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는 현재는 [[작센안할트]]인 옛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알트마르크(Altmark) 지역을 가리켜 '''프로이센의 요람'''(Wiege Preußens)이라고 말했다.], [[프로이센]]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브란덴부르크가 [[신성 로마 제국]] 안에 있는 선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. 선제후가 독립적인 국가의 칭호인 '왕(König)'을 사용할 시 [[독일왕]](Rex in Germania)과 구분이 안되기 때문이다.[* [[프로이센 공국]]이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까지 [[신성 로마 제국]] 영토 내에선 왕이라는 직책은 딱 2개만 존재했다. 황제의 후계자가 될 [[로마왕]](=독일왕), 그리고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. 보헤미아 왕국은 1526년 [[페르디난트 1세]] 이래로 [[합스부르크 가문]]에서 반세습화하여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. [[샤르데나 왕국]]도 왕국의 중심지는 사보이였으나 비슷한 연유로 사보이가 아닌 샤르데나 왕국으로 칭하였다.] 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브란덴부르크 왕국이라 하지 못하고,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바깥에 있는 프로이센 지역에 기반하여 독립국의 왕임을 내세울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라고 칭하였다.[* 이로 인해 [[군주]]를 부르는 명칭도 제1차 [[폴란드 분할]] 이전까지는 '프로이센에서의 왕(König in Preußen)' 이었다. 유럽식 [[외왕내제]]로 볼 수 있는데 [[프로이센 공국|프로이센]]에서만 [[왕]]이었지, 밖에서는 왕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[[선제후]]에 불과했다는 의미이다. [[노르만 정복]]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도 비슷한 사례인데 이들은 잉글랜드에서만 왕이었지, 프랑스 영토인 노르망디에서는 봉신에 불과했다. 프로이센 군주가 '프로이센 국왕(König von Preußen)'이라고 국제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[[7년 전쟁]] 이후였고, 이후 제1차 [[폴란드 분할]]으로 [[서프로이센]]으로 알려진 왕령 프루시 지역을 획득하면서 확인사살했다.] 신성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자 [[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]]의 귀족 의회인 [[세임]]이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왕이란 칭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지만, 정작 폴란드-리투아니아 국왕이자 [[작센 선제후국|작센]] [[선제후]]인 [[아우구스트 2세]]는 찬성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[[프리드리히 1세(프로이센)|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]] [[대관식]] 때 아우구스트 2세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. 프로이센 왕국은 [[브란덴부르크]], [[프로이센 공국]], [[베스트팔렌]]의 [[클레베]]-마르크 등 여러 곳으로 떨어져 있는 영토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은 개별적인 법률과 신분제 의회를 갖고 있었으나, [[프리드리히 빌헬름]] 대선제후의 주도로 중앙집권화가 완료되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[[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]] 시대에는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. 8만 명이라는 거대한 정예 [[상비군]]과 세수 중심의 관료기관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중앙집권을 이룬 프로이센은 이때부터 북부 유럽의 패자로 돌변하였다. 9만 명의 [[황제군]](Kaiserliche Armee)에 비해서는 적었으나, [[프로이센군]]은 영토 대비 8만 명을 차지하는 많은 숫자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정예 병사로 뽑았기 때문에 [[반란]]이 일어나도 금방 제압하고 중앙집권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. [[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]] 때에는 [[대북방전쟁]]에 참전, [[오데르 강]] 하구의 주요 항구인 [[슈테틴]]을 확보하였고 [[프리드리히 대왕|프리드리히 2세]] 때에는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에 참전해 [[합스부르크 제국|합스부르크령]] [[보헤미아 왕국|보헤미아]]의 핵심 영토였던 [[슐레지엔]]을 장악하였다. [[7년 전쟁]]에서는 크게 밀리면서 나라가 완전 망할 뻔 했지만, [[러시아 제국]]의 [[표트르 3세]]가 주도한 [[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]]으로 인해 기사회생하였다. 어쨌든 프로이센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북독일의 강자임을 증명하였다. 그리고 제1차 [[폴란드 분할]] 때에는 [[서프로이센]]을 확보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숙원을 달성하였다.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추가로 두 차례의 추가적인 [[폴란드 분할]]을 통해 [[바르샤바]]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, [[프랑스 혁명전쟁]]에 참전했다가 가장 먼저 [[프랑스 제1공화국|프랑스 혁명정부]]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마인 강 이북의 영토 점유를 인정받았다.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프랑스 편에 붙어 [[하노버 왕국|하노버]]와 [[브레멘]] 등을 합병하는 등 크게 세력을 키웠다. 하지만 프로이센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은 알게 모르게 점점 커져갔고, 결국 당대의 먼치킨 나폴레옹한테 도전했다가 제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 패배, [[틸지트 조약]](1807)으로 그동안 확보한 영토들을 거의 다 잃으며 일시적으로 [[프랑스 제1제국]]의 속국이 되었다.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할 즈음에는 다시 동맹군에 가담해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, [[빈 회의]]에서 [[작센 왕국]]의 북부 지역과 [[베스트팔렌]]·[[라인란트]] 등의 새 영토를 얻었다. 19세기에는 프로이센에서도 [[산업 혁명]]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[[독일 연방]]에서 북독일 [[관세동맹]]을 체결하고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한 [[라인란트]]와 [[베스트팔렌]], [[슐레지엔]]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.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뒤쳐진 점이 많았기에 자유주의 세력은 개혁을 꿈꾸었다. [[1848년]] [[3월]] 전 독일을 뒤흔드는 [[3월 혁명|자유주의/민족주의 대혁명]]이 일어나 [[의회]]가 설치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으나, 결국 국왕의 외면과 보수파의 진압으로 실패했다. 귀족이 아닌 민족, 다시 말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던 [[자유주의]]는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지배 계층인 귀족들에게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,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,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독일 황제 추대를 거부하였다(1849). 이후 나타난 총리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는 의회를 정치력으로 무력화시키고서는 아예 수족으로 부려가면서 통일을 위한 대업을 실시, [[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]](1864),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]](1866)과 [[프로이센-프랑스 전쟁]](1870)에서 승리하여 [[1871년]] 연방 형식으로 [[독일 통일]]을 완수, [[독일 제국]]을 수립하였다. 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 [[슐레스비히홀슈타인]], [[하노버 왕국]], 헤센카셀 선제후국, [[나사우]] 공국 등을 병합하며 세력을 크게 불렸으며 이 세력을 바탕으로 [[독일 제국]]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국의 면적의 66%, 인구의 60% 정도를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하였다. 이와 같은 독일·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[[바이마르 공화국]]에서도 '[[프로이센 자유주]]'로 존속하였다. 최초의 중앙집권적 근대 통일 국가를 건설한 국가로서 프로이센은 독일이 가지는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나라지만 [[제1차 세계 대전|두 차례의]] [[제2차 세계 대전|세계 대전]]의 결과 현재의 독일은 옛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 중 절반 이상을 [[폴란드]]와 [[러시아]]에 할양한 상태이다. 왕국으로 승격될 당시의 영토로만 한정할 경우 베를린과 현 [[브란덴부르크]] 주 정도만 제외하면[* 1701년 당시 프로이센 공국이었던 [[동프로이센]] 지역은 물론, 당시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중 [[오데르-나이세 선]] 동쪽인 노이마르크 지역(왕국 승격 당시 브란덴부르크 본토의 약 1/3)과 힌터포메른까지 상실했다.] 현 독일에 남아있는 영토가 거의 없다. 다만 앞서 말했듯 프로이센의 본체는 브란덴부르크였고, [[호엔촐레른 가문]]의 유산도 [[베를린]]과 [[포츠담]]에 모여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상실은 크지 않은 편. 현대 독일에 있어 프로이센은 자국사의 일부로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로 여겨지지만, 동시에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. 사실상 현재의 독일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[[독일연방공화국]]의 세 [[독일 총리|총리]]들([[콘라트 아데나워]], [[루트비히 에르하르트]], [[빌리 브란트]])부터가 반프로이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고, 과거 프로이센 영토의 대다수는 [[소련]] 영향력 하의 [[동독]]이 되거나 아예 폴란드와 소련에 귀속되어 서독의 프로이센 물이 많이 빠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